프랑스에서 ‘중국계 한식당’은 어떻게 ‘핫플’이 됐나 [특파원 리포트]
얼마 전 프랑스 파리 지하철에서 한 프랑스인이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고 있는데, 거기에 익숙한 얼굴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배우 현빈이었습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있었던 것이죠. 프랑스에서 K드라마를 보고 있는 현지인을 목격하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있습니다.세계 곳곳에서 K드라마의 인기는 더는 뉴스거리가 안될 만큼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한국에 벚꽃 보러 갈 계획을 세운다거나, 직접 한국 음식을 만들어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다소 신기한 일입니다. 취재진이 파리의 한 한식당에서 만난 프랑스인도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이 먹는 음식이 맛있어 보여, 식당을 검색해서 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는 한국 드라마 인기와 더불어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요즘 파리에서 뜬다는 '한식당' 정체는? 아시아 음식이라 하면 일본 음식과 베트남 음식을 대표적으로 떠올리던 프랑스에서 한식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은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얼마 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유명 백화점과 상점들이 모여있는 파리 최대 상권 중 한 곳을 지나다 보니 한 음식점 앞에 어마어마한 줄이 있었습니다. 친숙한 우리말로 쓰여 있는 간판과 '코리안 스트리트 푸드', 다시 말해 한국 길거리 음식이란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것이 누가 봐도 한식당이었습니다. 포장마차 느낌으로 꾸며놓은 한국 음식점인데,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선 들어본 적이 없던 곳이라, 이제 막 문을 연 맛집인가 보다 했습니다.그런데 네티즌들 리뷰를 찾아보니, 평가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한국인 네티즌들과 한식을 평소 자주 접했다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식이 아니다', '한식에 대한 모독이다'라는 혹평이 주를 이뤘습니다. 반면 아시아 음식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사이에서는 '처음 먹어보는 놀라운 맛'이라는 호평도 있었습니다. 여느 식당들처럼 단지 맛이 없다는 평가를 넘어(한식당들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니까요) 한식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고, 식당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중국식 국수에 불고기…정체불명 한식우선 긴 줄이 늘어서 있던 A식당을 찾아가 봤습니다. 내부에는 '오늘 술 친구는 나루해' 같은, 한국 젊은이들이 쓰는 표현이 적힌 네온사인이 달려 있고, 각종 한국 영화 포스터도 장식돼 있었습니다. '00포차'를 찍은 사진도 붙어있었는데, 사진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를 검색해 보니, 실제 서울 강남역 인근에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동해남부선'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이는 '동해님부선' 같은 이상한 단어로 된 네온사인도 걸려 있고, 한국 식당 느낌을 낸 건 분명해 보이는데 어딘가 어색한 점들이 보였습니다.대표 메뉴가 치즈 닭갈비인지 손님들 대부분은 즉석에서 조리되는 치즈 닭갈비를 주문해 먹고 있었습니다. 치즈 닭갈비를 한국 음식으로 규정해 맛을 평가하기엔 애매한 면이 있다고 판단해, 취재진은 비빔밥과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크림짬뽕을 시켜봤습니다. 보기엔 그럴듯해 보였고, 실제 비빔밥은 크게 문제 되지 않을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크림짬뽕은 아무리 퓨전이라 해도 한국에서 도통 먹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음식이 나왔습니다. 김치찌개와 순두부찌개는 더 심각했습니다, 우리가 평소 먹던 그 맛이 전혀 아니었고, 중국식 향신료나 양념이 들어간 듯했습니다.이런 식의 비슷한 식당들을 더 수소문해, 최근 파리 시내에서 체인점을 늘려가고 있다는 B식당을 가봤습니다. 식당 내부는 입구부터 화려한 등이 달려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한국보다는 중국풍에 가까웠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이곳에서도 '동해님부선'이란 네온사인이 똑같이 달려있고, A식당에서 본 한국 영화 포스터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마치 같은 인테리어 업체가 작업을 했거나, 사장이 똑같은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말이죠. 심지어 이 식당에는 띄어쓰기가 엉망인 한글 네온사인도 버젓이 달려 있었습니다.치즈 닭갈비가 대표 한식이라도 되는 듯 이곳 역시 치즈 닭갈비를 주력 메뉴로 하고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치즈 닭갈비와 매운 소불고기, '서울식 국수'라고 쓰여있는 메뉴와 김치(따로 주문해야 함)를 시켜봤습니다. 치즈 닭갈비는 비교적 무난한 수준이었던 반면, 매운 소불고기와 '서울식 국수'는 보기부터 전혀 한식이 아니었습니다. 고추기름이 국물처럼 흥건한 매운 소불고기에는 한국식 간장이나 고추장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우리 음식에는 잘 쓰지 않는 고수까지 들어있었습니다. 또 '서울식 '국수'는 중국식 탄탄면과 맛이 거의 흡사했고, 김치는 식초를 넣었는지 자연 발효 맛과는 다른, 톡 쏘는 시큼함이 강했습니다.알고보니 A식당과 B식당 모두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이었습니다. 파리 시내에서 여러 체인점을 두고 현지인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중국계 한식당, C식당 역시 메뉴부터 맛에 대한 평판이 앞서 두 식당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중국계 한식당은 최근 한식 열풍에 맞춰 파리 도심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데, 특히 한식을 처음 접해보는 현지인들 사이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중국계 한식당, SNS로 공격적 마케팅그런데 취재가 한창이던 어느 날, 프랑스에 사는 모로코인 친구가 가고 싶은 한식당이 있다며 연락이 왔는데, 놀랍게도 취재진이 다녀왔던 중국계 한식당, A식당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최근 틱톡 등 SNS에 자주 올라오는 유명한 식당이라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A식당은 정통 한식당이 아니니 다른 곳을 가자고 하니, 이 친구가 두 번째로 제안한 곳은 놀랍게도 또 다른 중국계 한식당, C식당이었습니다. 한국을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K드라마로만 한국을 처음 접한 이 친구로선 A식당과 C식당 모두 당연히 정통 한식당일 거라 생각했던 거죠.현지인들 사이 이런 중국계 한식당이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데는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들을 활용한 공격적 마케팅이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파리에서 20여 년간 한식당을 해온 이용경 프랑스 한식문화협회장은 중국인들이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들에게 상당한 비용을 주고 홍보를 맡긴다고 말합니다. 실제 A식당 밖에 걸린 화면에는 유튜버가 치즈 닭갈비의 치즈를 길게 말아 올리는 장면부터 불고기 등을 먹는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용경 회장은 간혹 중국계 한식당 홍보 영상을 보다 보면 아무 음식에나 다 치즈가 들어가 있어 정체불명의 한식이 되는 것 같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거대 자본, 한식당 인수까지 교민 사회에서는 최근 유명 한식당이 중국인에게 팔린 것을 놓고 위기의식도 감지됩니다. 당장 중국인에게 인수된 뒤 맛이 변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앞으로 이렇게 중국 자본에 넘어가는 식당들이 잇따를까 봐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이용경 프랑스 한식문화협회장은 중국인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 현금을 잔뜩 들고 찾아와 식당을 팔라고 했다는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회장은 이럴 경우 한식당을 운영하는 많은 한인들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습니다. 같은 한국인에게 식당을 인수하고 싶지만, 자본의 힘을 무시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제시하는 가격보다 더 높은 권리금을 부르며 식당 인수 의사를 밝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승부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국계 한식당들은 파리 주요 상권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파리 시내 곳곳에 체인점을 늘리며 세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중국인들의 거대 자본이 있습니다.■ 일본, 태국은 인증제 도입이번 보도가 나간 뒤 정체불명 한식당 난립이 파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제보가 잇따랐습니다. 한식이 인기를 끌면서 세계 주요 도시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의 식당이 많다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우리보다 먼저 프랑스에서 일식 열풍을 이끌었던 일본 식당들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중국인들이 일본 음식점을 차린 뒤 중식에 가까운 일본 음식을 내놓는 사례들이 늘자, 일본은 그 대책으로 자국 음식의 본래 요리법과 정체성을 지키는 식당에 인증 마크를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태국 역시 올해 초, 태국 정통 음식 기준에 부합하는 국내외 태국 식당에 인증제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이제 막 한식이 꽃을 피우려 하는 이 시점에 한식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입니다.